- 응모기간: 10월 12일(월) ~ 11월 13일(금)
배경 음악이 재생 중입니다.
박성모 건국대학교병원, 대한방사선사협회 부회장

흑백 영상 너머, 쇼비뇽블랑과 조개술찜

당신은 아마도 바다와 빛을 좋아할 겁니다. 그중에서도 바다를 비추는 윤슬 같은 빛 말이죠. 하지만 제가 다루는 빛은 조금 다릅니다. 온기도, 색채도 없는 ‘방사선’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빛입니다.
방사선사의 하루는 차가운 납 방어벽 뒤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굳이 온기 없는 장비와 흑백 세상에 머무느냐고요? 하지만 저는 갯벌을 닮은 이 직업이 좋습니다. 모니터 속 흑백의 영상 안에는 한 사람의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희미한 음영 사이로 숨어있는 아픔을 찾아내는 일은, 갯벌 속에 숨은 조개를 찾는 일만큼이나 세심하고 숭고한 작업입니다.
퇴근길, 코끝에 밴 정전기 섞인 먼지와 차가운 장비의 내음을 털어내며 문을 나섭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나 만을 위한 ‘동화(同化)의 시간’입니다. 스피커에서는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밤’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익숙한 전주가 시작되면, 좁은 주방은 순식간에 에메랄드 빛 제주의 바다로 변합니다.
마음의 아티팩트(Artifact)를 제거하는 해감
가장 먼저 조개를 소금물에 담급니다. 방사선사로 살다보면 마음속에 ‘긴장’이라는 노이즈와 아티팩트가 서걱거릴 때가 있습니다. 정확한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음악 속에 잠가 두고 조개가 모래를 뱉어내듯, 저도 오늘의 피로를 뱉어냅니다.
캄캄한 해감의 시간, 그것은 완벽한 검사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그 절실한 기다림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향의 레이어를 쌓는 베이스 조리
팬을 달구고 올리브유를 두릅니다. 편으로 썬 마늘을 넉넉히 넣고 황금빛이 돌 때까지 약 불로 볶습니다. 여기에 페페론치노나 청양고추를 투하합니다. 매콤한 향이 올라오며 주방의 공기가 바뀌는 순간, 병원의 공기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집니다. 마늘향이 기름에 충분히 베어 들면, 깨끗이 씻은 조개들을 쏟아붓습니다. 냄비 바닥에 조개가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파도가 자갈에 부딪히는 경쾌한 소음 같습니다.
쇼비뇽블랑의 사치와 증발의 미학
이제 오늘 하루 고생한 나에게 허락된 15,000원짜리 쇼비뇽블랑을 꺼냅니다. 코르크를 열 때 나는 경쾌한 소리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 같습니다. 조개가 잠길 듯 말 듯 술을 자작하게 붓습니다. 불을 세게 키워 알코올을 날려 보냅니다. 술기운과 함께 정체된 감정들이 증발하면, 냄비 안에는 바다의 진액만이 남습니다.
감칠맛의 완성, 버터 한 조각
조개들이 하나 둘 “탁, 탁”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흑백 영상 속에서 병변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처럼 반갑기만 합니다. 이때 차가운 버터 한 조각을 넣습니다. 굳어 있던 마음이 노랗게 녹아내리며 국물에 풍미를 더합니다. 마지막으로 향긋한 미나리나 쑥갓을 얹어 초록의 생기를 더하면, 제 주방은 완벽한 바다가 됩니다.

바다와 하나 되는 시간
잔에 남은 쇼비뇽블랑을 한 모금 마시면, 시트러스한 향이 제주 함덕의 바람처럼 콧등을 스칩니다. 창밖의 도시 소음은 이제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노래 속의 파도 소리와 냄비 속의 보글거리는 소리뿐입니다. 흑백의 영상을 보며 긴장하던 눈을 감고, 온전히 바다의 맛에 몸을 맡깁니다.
방사선사의 삶은 어쩌면 이 조개술찜의 국물과 같습니다. 화려한 메인 요리는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생명을 밝혀 내기 위해 꼭 필요한 깊고 진한 밑바탕 말입니다.
오늘 내가 포착한 찰나의 흑백 영상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빛이었음을 되새깁니다. 비록 우리는 차디찬 방호벽 뒤에 서 있지만, 우리 손끝에서 시작된 그 빛이 결국 누군가를 푸른 바다로 돌려보내는 가장 정직한 길잡이가 될 것임을 믿습니다.
제주도의 푸름 밤 노래가 끝나갈 무렵, 저는 이미 바다에 닿아 있습니다.
당신의 주방에서 끓어오르는 향기, 최성원의 목소리, 그리고 잔속에 담긴 작은 사치. 이것으로 충분히 오늘 하루는 완벽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