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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창문으로 탐스러운 눈이 내리는 것이 보입니다. 환기도 시킬 요량으로 창문을 열어봅니다.
찬바람과 함께 눈이 방충망을 두드립니다. 어제는 서울에 눈이 8센티미터까지 내리므로 교통이 복잡할 거라는 일기예보를 들은 터라 아침부터 온몸을 보온하기 위해 자동차 월동장비 챙기듯 동여 메고 나왔습니다.
일기예보와는 사뭇 다르게 밤새 내린 눈은 많이 녹은 상태였지만,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가기엔 충분했습니다.
어렸을 때처럼 눈 위를 달릴 순 없었지만, 고개 돌려 쳐다본 발자국에서 지난 12월 5일 고려대학교 송년회의 밤이 떠올라 임인년을 마무리하듯 소담스럽게 적어보려고 합니다.

고려대학교 방사선학과는 1940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서 1971년 고려대학교에 흡수 합병되어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간호대학, 보건과학대학이 되었습니다. 눈 오는 날, 그 시절을 느낄 순 없지만, 아마도 그 날도 오늘처럼 눈이 내리고 커피한잔을 마시며 교정에 쌓이는 눈을 보고 있었을 그 누군가의 시각으로 미루어 짐작하며, 저도 커피한잔과 함께 그 역사를 커피 향에 잠깐 담아 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는 뒤로하고 광복 후 1948년 일본식 구제 의학전문학교에서 미국식 신제대학으로 개편되어 ‘서울여자의과대학’이 되었으며, 1957년 남녀공학이 되면서 ‘수도의과대학(1963~1966)’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리고 1966년에 국학대학을 인수 합병하여 종합대학이 되면서 우석 김종익의 호를 따서 ‘우석대학교(1966~1971)’로 개칭됩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우석학원은 거액의 빚과 경영난에 부딪혀 1971년 12월 고려중앙학원에 합병되었다가 1972년 졸업자부터 고려대 졸업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도의과대학’, ‘우석대학교’, ‘고려대학교 병설 보건대학’,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으로 진화하여 방사선학의 메카라 자부했던 고려대학교 방사선학과. 참 많은 시간이 흘렀으며, 많은 학생이 대학로, 정릉골, 안암골 등을 거쳐 면허를 취득하고 의료기관 등으로 진출했습니다. 역사의 한 장을 지나간 고려대학교 방사선학과 교우회는 밴드 등 소셜 커뮤니티에서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교육지 등 프로젝트 소모임은 병원, 지역, 학번, 동호회 등으로 활성화되고 있으므로, 코로나로 다소 침체되었던 교우회가 점차적으로 단합되고 하나가 되는 모습입니다.

매년 12월 첫 번째 월요일은 모교에 흔적을 남겼던 그 사람들이 모이는 날입니다. 작고하신 선배님도 계시고, 세월의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느낄 수 있는 선배님, 파릇한 후배님들 50여명이 2022년 12월 5일 오후 6시 30분 고대 안암병원 근처 ‘더씨’에서 그 동안 못 나눴던 밀린 숙제 같은 이야기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날 행사는 제26대 이기섭(84) 교우회장이 그동안 24・25대 교우회 전임회장으로 수고했던 삼성병원 윤정수(84) 교우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노고를 치하하였습니다. 어두운 시절이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모교인 고려대학교 방사선학과가 보건계열 타 학과와 융합되고 끝내 후배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정책으로 메카의 맥을 이을 수 없는 시기입니다. 그래도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교우회를 이끌어 온 노력에 선・후배는 존경의 마음을 모아 준비하였습니다. 비록 고려대학교 방사선학과에서 후배・후학 진출의 기회는 없어졌지만,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더 많은 발전의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기분 좋은 생각을 하는 동안 원로이신 김원철 교우(67)와 최종학 교우(70)의 격려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늘 한결같은 두 분의 모습에서 또 한 번 울컥함을 느껴봅니다. 초창기에서 부흥의 시대를 짊어지고 오신 두 분, 물론 많은 원로 교우들이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열거할 수 없음에 안타까움이 더 고조되어 코 끝이 적셔집니다.

새로운 장을 만들고 열어 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그것을 향유한다는 것으로 위로를 받지만, 어느 덧 거스를 수 없는 세월 속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일일이 후배・후학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움직인 그 행보에 뜨겁고 열정적인 박수로 보답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후배들에게 자존감과 자긍심을 다시 끌어내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힘주어 말씀해 주신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느꼈고, 지난 세월을 뒤 돌아봄으로써 다가올 희망찬 시간이 도래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박준철(07) 총무이사의 교육지 프로젝트 진행사항의 보고에서는 방사선학과 교우들의 참여자가 약 180여명, 진행모임은 22건으로 교육지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주었으며, 12월 20일까지 약 30건의 교육지 프로젝트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교육지 프로젝트란 교우회 회원이면 누구나 모임을 가질 수 있으며, 이기섭(84) 교우회장이 소정의 금액을 지원하는 사업으로써 교우회를 활성화시킴을 목적으로 교우회의 동정 및 교류가 이루어짐으로써 침체되어가는 모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2022년 하반기에 시작한 사업입니다.

이어서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백화현(89) 부회장의 진행으로 각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팀장 및 교우를 소개하였습니다. 드디어 맛난 음식과 함께 흥을 돋울 시간입니다. 푸짐하게 차려진 중식과 함께 한용문 교우(84)의 흥겨운 노래가 이어졌습니다. 역시 우리 민족은 흥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온 전통이 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방사선학을 전공하고,
전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연이어 발자국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작이 있으면 늘 끝이 있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하나가 되는 경우는 스포츠 경기에서 축구가 끝판 왕이라고 합니다. 그와 버금가는 것이 같은 시대를 살아왔거나, 같은 문화를 체감하며 살아온 경우의 모임에서 그 효과가 있다는 것이 틀림없나 봅니다.

2022년 고려대학교 방사선학과 송년의 밤이 저물어 갑니다. 못내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장내가 소요해집니다. 이곳저곳에서 2차를 준비하거나, 다음 모임은 언제, 누구랑 같이 하자, 분주해졌습니다. 선・후배를 막론하고 또 다른 장소에서 함께하는 것을 원하는 목소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런 모습일까 싶습니다. 활기찬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보려합니다.

2022년 임인년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연말이라서 오늘도 라디오에서는 음주운전 적발에 대한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열어놓은 창문사이로 여전히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이 들어옵니다. 눈발은 약해졌지만, 그 모습은 송년의 밤에 있었던 교우들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자유롭게 흩날리는 모습과 건강을 유지하며 건장한 모습으로 조용히 내려앉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방사선학과’ 당신은 역사의 한 장으로 남았지만, 그대와 한 시절을 풍미한 우리들은 당신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들은 계속적으로 당신이 가르쳐준 그것을 발전시킬 것이고 많은 사람과 나누어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대한방사선사협회’에 특정학교의 송년 모임의 이름을 빌어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방사선사의 시작을 같이 한 역사를 잠깐이나마 공유하고, 어느 학교이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는 동일하기에 그 뜻을 같이 실어 빛내고자함이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적어 봤습니다. 연구실을 들어오며 하얀 눈 위에 찍어 놓은 발자국을 방사선학을 전공하고, 전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연이어 발자국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연구실 창문을 닫고 서늘해진 실내온도를 다시 올려보려고 합니다. 늘 건승하시고 행복한 시간 많이 만들어 가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