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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길 전) 동신대학교 방사선학과 교수

많은 세월이 흘러도, 가슴속에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故 김광철 님은 전남대학교병원에서 40여 년간 근무하셨습니다. 훤칠하게 큰 키와 듬직하고 커다란 체구, 그리고 너무나도 온화하고 따뜻했던 인상, 고인은 마치 추운 겨울날 따스한 햇살을 품고 서 있는 커다란 나무와도 같았습니다.

먼발치에서 고인의 그 커다란 윤곽만 보고도 주변 사람들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아, 우리 선배님이 오시는구나!’ 그 듬직한 체구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인자함은 주변의 어수선한 공기마저 단숨에 바꾸어 놓곤 했습니다. 겉모습은 누구보다 우람하고 당당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고인의 눈빛은 언제나 한없이 순박하고 인자했습니다.

광주광역시회 1대 회장
故 김광철 회장님

엑스선사(73년도 방사선사 개칭) 국가고시 1회, 그리고 대한민국 방사선 의료의 한 시대를 걸어오신 분

고인은 단순한 직장 상사가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보건의료 초기 역사를 온몸으로 개척하고, ‘엑스선사(73년도 방사선사개칭) 국가고시 1회(1965년도 4월 29일)‘라는 커다란 자부심을 품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방사선 기술이 아직 낯설고 생소하던 시절, 맨땅에 헤딩하듯 학문을 익히고 현장을 일구었던 그 선구자적인 길, ‘방사선사 원년 멤버’라는 무게감 앞에서도 그분은 결코 자만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책임감을 가슴 깊이 새긴 채, 당신이 먼저 걸어간 길을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쉽게 걸어갈 수 있도록 묵묵히 등불을 밝혀주셨던 분이었습니다.

직장에서 만난 고인은 단순한 조직의 관리자나 상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저를 비롯하여 함께 일하던 수많은 후배들에게 언제나 ‘참된 교육자’였습니다. 당시 의료 현장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자칫 작은 실수 하나가 큰 사고로 이어질수 있는 긴장감이 감도는 서글픈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인은 단 한 번도 후배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서툴고 어설픈 후배가 실수를 저지를 때면,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며 따뜻하게 다독여 주셨습니다.

장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거나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가르칠 때, 고인의 눈빛은 언제나 진지함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기술만을 전달하는 기계적인 상사가 아니라, 방사선사로서 가져야 할 직업 윤리와 인성,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스승이셨습니다. 후배들이 질문을 던질 때면, 아무리 바쁜 순간에도 커다란 체구를 낮추어 후배의 눈높이에 맞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가시던 그 다정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고인의 밑에서 일을 배운 수많은 후배들은 의료기술만 배운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고인은 영원히 ‘직장 상사’라는 딱딱한 명칭보다는 ‘스승님’이라는 가슴 먹먹한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평생 한 길을 걸으며 지켜낸 직업정신
고인은 당신의 직업을 단순한 생계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걸어온 방사선사의 길에 대한 애정과 집념은 참으로 깊고 숭고했습니다. 그 열정을 증명하듯, 고인은 해방 직후부터 우리나라 보건의료 현장에서 쓰이던 X-Ray 튜브(크룩스관, 정류관)들을 하나하나 수집하고 모아두셨습니다. 의료 기자재가 귀하고 기술이 척박했던 시절부터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의 손때와 땀방울이 배어 있는 그 수집품들은, 단순한 의료장비 부품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 의료발전의 역사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귀중한 사료들이었습니다. 고인이 평생에 걸쳐 정성껏 지키고 모아두셨던 이 유산들은 오늘날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박물관에 보관·전시되어 한국 의료의 귀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고인의 열정과 집념이 후학들과 후세 사람들에게 소중한 교육의 장이자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박물관에 고이 보존된 그 X-Ray 튜브들을 바라볼 때마다, 평생을 한 길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헌신하셨던 고인의 거룩한 직업정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술과 노래,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셨던 선생님
고인은 술과 노래, 그리고 사람을 향한 무한한 정(情)이 넘쳐나신 분이었습니다. 고인의 삶을 떠올릴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술’과 ‘노래’, 그리고 ‘사람’이었습니다. 유달리 술을 좋아하셨던 고인은 술 자체의 맛보다도,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사람들과의 대화와 정을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고인은 특히, 노래를 잘 부르셨습니다. 고인이 술자리가 무르익고 기분이 좋아지시면 묵직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즐겨 부르시던 노래가 바로 가수 안다성의 <사랑이 메아리칠 때>였습니다.

“외로울 때면 밤하늘을 바라보고 / 슬퍼질 때면 바닷가를 걸었네…“

고인 특유의 깊은 울림으로 흘러나오던 그 노래는 술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곤 했습니다. 노래 한구절 한 구절에 담긴 그분의 낭만과 온기, 그리고 해맑은 너털 웃음은 주변 사람들의 모든 근심과 시름을 잊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았습니다.

친구와 후배를 위해서는 늘 자신의 잔을 먼저 내어주셨던 분
고인에게 친구와 후배란 삶의 전부와도 같았습니다. 남에게 되받기보다는 내가 한 잔 더 사주는 것을 기쁨으로 아셨던 분. 고인의 호주머니는 늘 가벼웠을지언정,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그분의 온기로 풍족했습니다.

84세의 홀연한 삶, 독신의 쓸쓸함 뒤에 남겨진 빛!
고인은 84세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가정을 이루지 않고 홀로 걸어가는 삶의 길목에서 때로는 얼마나 깊은 외로움과 고독이 찾아왔을지, 이제야 감히 가슴으로 헤아려 봅니다. 외로울 때면 밤하늘을 바라보고 슬퍼질 때면 바닷가를 걸었다는 그 노래 가사처럼, 어쩌면 그 노래는 고인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나지막한 고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84년의 삶, 홀로 걸어온 길 위에 남겨진 따뜻한 빛
하지만 고인은 결코 외로움에 함몰되거나 삶을 쓸쓸하게 놓아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고인에게는 가정이 없는 대신 함께 일하는 일터가 가정이었고, 가르치는 후배들이 자식이었으며, 늘 곁을 지켜주는 술동무와 친구들이 가족이었습니다. 독신의 삶을 택하셨기에 어쩌면 더 사심 없이 후배들을 사랑할 수 있으셨고, 더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직업과 학문에 순정을 바치실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고인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마지막 순간까지 담담하고 기품 있게 걸어가신 모습은 참으로 고결했습니다. 84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생의 소풍을 마치고, 고인은 이제 모든 짐을 내려놓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저 높은 곳에서 평안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훤칠한 키로 멀리서도 환하게 빛나던 저의 스승이자 선배님!
당신은 국가고시 1회 방사선사라는 무거운 이름을 내려놓고, 좋아하시던 술과 정겨운 노래, 친구들의 웃음소리도 뒤로한 채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되셨습니다. 비록 그 거대하고 온화했던 모습은 더 이상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당신이 한국 의료 역사에 남기신 숭고한 업적과 우리 가슴속에 심어주신 따뜻한 가르침은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서툴렀던 저를 따뜻하게 감싸안아 주셨던 그 커다란 손길, 술잔을 건네며 부르시던 그 노랫소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