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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집에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허준〉이라는 옛날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재방송이나 봤던 영화를 다시 볼 때 느끼는 최고의 재미는 다음 장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치 내가 닥터 스트레인지가 된 것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같은 유치한 상상을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의 그 느낌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마침 내가 허준이라는 드라마에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 허준이 자신의 스승을 해부하는 장면이 나왔다. 울면서 스승의 몸을 해부하는 모습, 그리고 아픈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자에게 기꺼이 내주는 스승의 모습에 눈물이 찔끔 흘렀다. 그 후부터 허준은 최고의 명의가 된다.

과거에 환자의 질환은 허준과 같은 의사 혼자만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기술로 진단 및 치료를 진행했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의술은 물론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다양한 분과로 분리되고 있으며, 그만큼 과거와 같이 의사 혼자만의 능력으로 환자를 진단 및 치료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의료현장에 의료기사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의료기사직은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 치위생사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의료기사에 대해 언급된 것은 1963년 ‘의료보조원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이때는 ‘의료기사’가 아닌 ‘의료보조원’이라 칭했으며,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감독하에 진료 또는 의화학적 검사의 보조에 관한 업무에 종사하는 자’로 정의하였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1973년 ‘의료보조원법’은 폐지되고, 그 해에 ‘의료기사법’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의료기사에 대한 정의와 목적을 ‘의사, 치과의사의 지시 및 감독하에 진료 또는 의화학적 검사에 종사하는 자(이하 “의료기사”라 한다)의 자격, 면허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보건 및 의료향상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의료기사는 단순히 검사의 보조원에서 ‘의사 및 치과의사의 지시 및 감독하에’, 검사를 시행함에 있어 ‘주체적으로’ 검사를 진행하는 종사자로 변경되었다. 이후, 1988년에는 ‘감독’ 이라는 단어를 법에서 삭제하고, ‘의사, 치과의사의 지도하에 진료 또는 의화학적 검사에 종사하는 자’로 정의가 변경되었고, 2016년 ‘의료기사법’이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로 변경되면서 의료기사의 정의는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진료나 의화학적(醫化學的) 검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라고 개정되어 지금까지 적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법의 변화는 의료기술 발전에 따른 의료기사의 전문성 향상과 의료 현장에서 의료기사의 역할 및 범위가 확대됨에 따른 변화가 일부 반영된 결과로 사료되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미비한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1963년 의료보조원법의 취지는 의료보조원으로 하여금 진료 및 검사의 보조를 의사의 감독하에 진행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때는 방사선사를 ‘엑스선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방사선사라는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나라에서 방사선사라는 호칭이 널리 보급되지 못한 것은 우리 방사선사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어느 연구 논문에서는 의료 환경 종사자 간의 관계를 ‘수평적 분업’(horizontale Arbeitsteulng)과 ‘수직적 분업(vertikale Arbeitsteulng)’으로 정의하였다. 수평적 분업은 의사와 의사간의 관계라고 말한다면, 수직적 분업은 의사와 간호사, 의료기사 등의 관계를 말한다.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서 정의하고 있는 의료기사에 대한 정의 중 ‘의사 및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라는 내용은 우리 의료환경에서 의사직과 의료기사직의 수직적 분업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의사직과 비 의사직 간의 수직적인 관계는 외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질병의 진단 및 치료의 주체는 의사직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에는 ‘지도’가 아닌 ‘처방 및 의뢰’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이는 수직적인 관계이지만, 서로의 전문성은 인정된다고 볼 수 있다.

방사선사의 전문성에 대한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미국과 호주는 의사의 검사 요청에 따라 방사선 검사가 이루어지고, 검사에 대한 책임을 방사선사에게 묻고 있으며, 의사와 방사선사가 서로의 전문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으며, 일본은 1951년에 이미 ‘진료엑스선기사법’ 이라는 단독법을 제정하여, 방사선사의 정의 및 업무 범위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의사 없이 물리치료실 및 임상병리 검사실을 만드는 것은 좌절되었다. 의료기사 관련 단체는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서 의료기사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내용 중 ‘의사 및 치과의사의 지도’라는 문구를 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에 반해 의사단체는 ‘의료기사 제도를 둔 입법 취지와 의료인이 행하는 의료행위가 직접 국민의 보건과 관련되어 있어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갖춘 의사가 아니면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라는 주장으로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 정의된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라는 문구가
방사선사에게 현실적으로 타당한지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한다.

의료기사는 의료기사의 영역에서는 국가가 인정한 전문가 집단이다. 의료법의 목적은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 있으며,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의 목적은 이 법을 통해 국민의 보건 및 의료향상에 이바지함에 있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의사와 의료기사 간 전문성에 인정과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사의 전문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만큼 의료기사의 전문성 또한 인정되어야 한다. 이같은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한 여러 정치인들이 ‘지도’를 ‘처방’이나 ‘의뢰’로 변경해야 한다는 취지의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 개정’을 발의한 상태이다.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 정의된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라는 문구가 방사선사에게 현실적으로 타당한지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고민해 봐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질환 진단 및 치료에 특화된 전문성을 가지고 있고, 방사선사는 방사선에 대해 전문적인 대학교육을 받고 있으며, 그 교육시간은 의대생의 교육시간과 견줄 수 없이 많다.

또한, 임상에 진출 후에도 보수교육 등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에 대해 지속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환자의 피폭선량 감소와 영상의 질 향상을 위해 꾸준한 연구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의료 방사선 관련 전문가이다. 그러므로 현재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서 정의하고 있는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라는 용어는 방사선사의 전문성을 고려했을 때 ‘의뢰’ 또는 ‘처방’으로 변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엑스선사’ 선배님들은 검사보조 일을 하시면서도 후배들은 ‘방사선사’라는 자랑스러운 이름과 보조가 아닌 주체적으로 검사를 하는 직업을 물려주셨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방사선사들은 미래의 후배 방사선사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까? ‘지도’가 아닌 ‘의뢰’ 또는 ‘처방’이라고 개정된 법과 방사선 검사의 전문가라는 자부심과 검사의 주체라는 자존심 아닐까?

처마 밑의 단단한 돌에 빗방울이 남긴 흔적을 보며, 언젠가는 나의 이 바람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2022년 3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