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모기간: 10월 2일 (수) ~ 11월 18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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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양한준(전, 을지대학교 교수)
변화의 파도는 늘 우리 발목을 적시지만, 결국 정신을 적시는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자연 · 형이상학 철학자)”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지요.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흐름을 통해 “존재란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을 전한 이 경구는, 필름을 현상하던 시절의 암실에도 묵직한 메아리로 남았습니다. 현상액에 잠긴 흑백 이미지 한 장에도 환자와 제 삶의 문맥이 나란히 스며 있었으니까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제 인공지능(AI)으로 이어진 변화의 물결은 기술을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배운 “방사선=인간의 해석”이라는 오랜 공식을 결코 버릴 수 없었습니다. 선명한 화소가 질병을 가리켜도, 그 그림자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더하는 일은 결국 사람의 몫이니까요.
1. 필름의 슬로우 모먼트, 인간 감성의 원형
아날로그 시절, 암실에서 느꼈던 기억 중에 우리는 필름 카세트에 스며든 붉은 빛을 보며 이미 ‘시간’을 읽어냈습니다. 현상기가 내는 소리와 흔들림에서 ‘적막한 30초(내가 찍은 필름을 현상하려고 암실에서 작업 중 필름이 현상액 속에 전부 담가지는 시간)’는 의학적 추론이 시작되는 의례(儀禮)였죠. 그 시간이 주는 느림은 ‘촬영・판독・사고(思考)’가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지게 했고, 환자에게 향한 공감과 책임을 정제했습니다. 손끝에서 미세하게 떨리던 필름의 무게감, 그리고 환자의 안색·숨결·눈빛까지 기억하려 애쓰던 그 감각적 총합이야말로 방사선사의 뿌리였습니다.
2. 초연결·초속도의 시대, 놓치기 쉬운 ‘사람 냄새’
AI가 등장한 오늘날, CT 한 장은 0.1초 만에 분할되고, 패턴은 즉시 색인 됩니다. 데이터 라인은 병원 서버와 클라우드를 넘어 가정용 헬스 디바이스까지 확장되었죠. 덕분에 우리는 재현성·정확성·병변 탐지율에서 전례 없는 진전을 맛봅니다. 그러나 속도는 경험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자동화된 리포트만으로는 환자가 짊어진 불안과 삶의 맥락, 치료 과정에서 직면할 감정적 파노라마를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인간적 감성은 필수불가결한 ‘결핍 보완 장치’가 됩니다.
3. 가다머가 말한 “해석의 대화”
‘한스-게오르크 가다머(1900~2002, 독일의 대표적 해석학 철학자)’는 “이해란 언제나 해석자 자신을 열어젖히는 일”이라 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대상을 해석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재해석합니다. AI가 내놓은 통계, 흑백의 묘한 지도(그레이스케일), 위험 점수… 이 모든 ‘제안’은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질문지입니다. 기계를 절대시하면 방사선사의 존재 증명은 취약해집니다. 반대로, 기계와 대화하며 자기 성찰을 반복할 때 우리의 직무는 깊이를 얻습니다.
4. 감각·직관·공감: 세 갈래 뿌리
감각: 촬영 전, 환자가 내뱉는 한숨의 길이·힘·주기를 감지하십시오.
직관: 이미지는 정적이지만, 몸은 동적입니다. “이상하다”는 번뜩임이 AI보다 빨리 생명을 살립니다.
공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환자는 자신을 ‘낯선 기계에 내맡긴 존재’로 느낍니다. 검사의 의미·다음 단계·기대치를 설명하며 ‘심리적 방호벽’을 세워 줘야 합니다. 이때 따뜻한 눈 맞춤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약물 못지않은 치유가 됩니다.
5. 기술이 넓혀 준 운동장, 정체성의 재설계
AI는 대용량 시뮬레이션으로 희귀 질환 알고리즘을 학습하고, 일상 검진 데이터를 실시간 피드백해 방사선사의 관찰 범위를 병원 밖으로 확장합니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책임·윤리·신뢰의 무게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지 해석자’를 넘어 ‘의료 스토리텔러·디지털 윤리 설계자’로 올라서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다움은 사치가 아닌 직무 능력의 핵심 역량이 됩니다.
6. 감성 근육을 단련하는 다섯 가지 기본
– 느린 관찰: 매일 한 장의 이미지를 5분간 묵상하며 임상·예술·철학적 질문을 던질 것.
– 메타 커뮤니케이션: 환자에게 단순 설명 대신 “지금 어떤 기분이신가요?”를 물으며 감정 어휘를 확장할 것.
– 다학제 독서: 영상의학~AI 논문과 함께 문학·미학·신경윤리 서적을 병행할 것.
– 몸 감각 유지: 장시간 모니터 앞 자세가 감정을 무디게 함을 기억하고, 숨쉬기 명상·스트레칭·운동으로 감각을 깨울 것.
– 피드백 일기: 하루 한 번, 자신이 해낸 말·표정·행동이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서술적 기록을 남길 것.
7. 후배에게 띄우는 다섯 문장
– 기술을 두려워하지 말되, 절대시하지 마라.
– 데이터 뒤편의 삶의 자리를 읽어라.
– 소통과 윤리가 무너지면 정확도 99%도 무의미하다.
– 속도가 절반이라면 깊이는 나머지 절반이다.
– “나는 기계를 넘어 사람의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다”라고 매일 선언하라.
8. 結語―파도 위의 배려
필름 한 장, 픽셀 한 점, 검사 영상 한 프레임, 텍스트 한 줄을 넘어 환자의 서사를 긍정하는 이들이라면 변화의 파도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기계가 빚어 준 속도 위에 사람이 더하는 공감이 포개질 때, 의료는 기술 이상의 서사가 됩니다. 저는 그 파도의 끝, 조금 앞선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함께 흐르되, 서로를 잃지 않는 길 위에서. 2025.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