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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재 가야대학교 방사선학과 교수

지난 6월 말 모 병원 영상의학과에서 근무하던 방사선사가 출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유가족과 유족지원단은 고인의 죽음에 직장 내 괴롭힘과 부당한 근무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병원의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고인의 사망과 직장 내 괴롭힘 사이의 구체적인 인과관계는 관계 기관의 공정하고 철저한 조사와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 사실관계가 확인되기 전에 특정 개인이나 기관을 단정적으로 비난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단순한 개인의 비극으로만 바라보아서도 안 된다. 동일한 현장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의 증언과 추가적인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을 넘어 우리 의료현장의 노동환경과 조직문화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의료현장은 강한 위계와 업무 분업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선배의 교육과 관리자의 지시는 환자 안전과 업무 효율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위계가 통제로 변하고, 교육이 폭언과 모욕으로 변하며, 업무지시가 부당한 압박으로 변하는 순간 조직은 사람을 보호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는 공간이 된다. 특히 “병원은 원래 힘들다”, “신입 때는 다 그렇게 배운다”, “선배가 시키면 따라야 한다”는 식의 관행은 더 이상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힘든 업무와 정당한 업무지시를 감내하는 것과 폭언·모욕·따돌림·부당한 업무지시를 견디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제 의료계가 바꾸어야 할 것은 단순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라는 선언이 아니라 침묵을 강요하는 조직문화 자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한방사선사협회는 단순한 직능단체를 넘어 회원들이 안전하고 존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보호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첫째, 상시적인 노동권 상담 및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부당한 업무지시, 근로계약 위반, 폭언·폭행, 부당한 인사조치 등을 경험한 회원이 병원 내부에만 문제를 제기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협회가 상담창구를 운영하고 필요할 경우 노무·법률 전문가와 연계해 상담부터 신고와 분쟁조정까지 지원해야 한다.

둘째, 방사선사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병원 규모와 지역, 고용 형태, 근무 부서별로 노동환경을 조사하고 신규·저연차 방사선사의 교육과 업무 분담, 초과근무, 휴게시간, 연차 사용, 폭언과 부당한 지시 등의 실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셋째, 직장 내 괴롭힘 예방 교육을 실질화해야 한다. 법정 교육을 이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행위가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피해자는 어떻게 기록하고 신고해야 하는지, 동료와 관리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넷째, 의료기관과의 협의에서 노동환경 개선과 조직문화 혁신을 핵심 의제로 제시해야 한다. 방사선사는 전문직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노동환경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전문직의 권한과 책임에 걸맞은 노동권과 인격적 존중이 보장되어야 한다.

보건의료인은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직장 내 괴롭힘은 가해자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지속되기도 한다. 동료가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괜히 끼어들지 말자”고 생각하거나, 후배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도 “나도 그렇게 버텼다”고 넘긴다면 같은 문제는 반복된다.

보건의료인에게 필요한 자세는 방관하지 않는 것, 기록하는 것, 피해자를 고립시키지 않는 것이다.

부당한 지시와 폭언, 반복적인 업무 배제 등이 발생했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객관적인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는 특정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또한 피해자에게 “네가 너무 예민한것 아니냐”는 말을 하기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다”, “혼자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로 함께해야 한다.

중대한 사망 사건과 직장 내 괴롭힘 의혹이 제기된 경우, 중요한 것은 단순히 조사를 실시했는지가 아니다. 조사가 얼마나 독립적이고 공정했는지, 유가족과 노동자들이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병원은 고인의 개인적 특성이나 사적인 문제를 근거로 사건을 축소하기보다 고인이 어떤 환경에서 근무했는지, 업무량과 근무 형태는 적정했는지, 조직 내 갈등이나 문제 제기가 있었는지, 관리자는 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또한 ‘누가 잘못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조직이 이를 예방하지 못했는가, 왜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웠는가, 관리자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까지 살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의료기관과 보건의료단체는 다음과 같은 제도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방사선사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애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고,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대한방사선사협회는 이번 사건을 한 병원의 개별적인 문제로만 바라보지 말고 방사선사 전체의 노동환경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보건의료인 역시 동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환자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의료현장이라면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생명과 존엄 역시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

선배의 역할은 후배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는 것이며, 관리자의 역할은 두려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협회의 역할은 회원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함에 맞설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방사선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제 보건의료계가 답해야 한다.

다시는 어떤 보건의료인도 출근길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고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책임 있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