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그랜드볼륨에서 개최된 제3회 김우중 의료인상 시상식에서는 이규환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교수(치과의)를 포함해 총 8명이 수상했습니다.
의료봉사상 개인 수상자는 2004년 기독방사선선교회를 세워 쪽방촌에서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방사선 진료를 펼친 유명선 방사선사(현 대한방사선사협회 선거관리위원장)입니다. 2011년 네팔 KOICA 봉사단 활동을 시작으로 해외 의료활동에 눈을 뜨고 현재는 국내외 무의촌을 직접 찾아 방사선 진료 봉사를 펼치고 계신 유명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유명선 위원장님,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충남 예산군 삽교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의사셔서 부유하게 자라다가 6.25 전쟁 이후 부친의 의업이 힘들어지면서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개인병원에서 일하게 됐고,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일하며 기독봉사회를 조직해 소록도 봉사, 무의촌 의료봉사, 대학교수, 해외봉사를 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파트 노인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74년부터 2023년 사이 41년 동안 방사선사로 실무를 맡았고, 봉사활동을 위한 해외 거주 3년, 대학교수로 5년을 일했으니 총 49년 동안 의료계에 종사했습니다.

의료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아버지께서 보건지소장으로 일하시는 것을 보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의료봉사를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동아리활동부터입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봉사에 뜻을 갖게 된 위원장님의 신념이 궁금합니다. 방사선사로서의 행위를 넘어 특별히 봉사에 관심을 기울이시게 된 이유가 있으실까요?

사실 처음에는 남들이 하는데 관심있어서 따라다닌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자발적 봉사단체를 설립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방사선사 박광호 후배가 네팔봉사를 다녀오고 나서 저에게 같이 ‘기독방사선 봉사회를 만들어 국내에 거주하는 해외근로자를 도와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방사선사 5~6명이 1톤 트럭을 중고로 사서 X-RAY와 초음파 장비를 싣고 다니며 검사하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해외까지 꾸준한 의료봉사를 행하게 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처음은 국내에 거주하는 해외근로자의 건강 돌봄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로 서울역 노숙자와 쪽방 무의탁 노인을 대상으로 의료혜택을 못 받는 분들을 보살피게 됐습니다. 그러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기독봉사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고, 병원을 정년 퇴임한 후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단을 통해 네팔과 필리핀에서 해외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적인 의료봉사를 이어가시게 된 이유는요?

봉사하는 곳에서 계속 저를 필요로 했고, 저 또한 제가 안가면 갈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지금까지 이어 오게 됐습니다.

현재 위원장님의 손길(봉사 및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계층(또는 단체, 장소 등)이 있으세요?

딱 어느 한군데만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습니다. 김우중회장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처럼 도울 곳은 많은데 제 손이 미치지 못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장애인아시안게임,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자원봉사자 등으로 국제행사에도 참여하시게 된 이유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참여 이유라면 ‘우리나라에서 국제적인 행사를 할 때 자원봉사자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영광일까’ 하고 생각했고 나의 작은 참여가 나라에 큰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이 많지만 2014년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 도핑체크 임무를 맡았었는데, 페어댄싱 종목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호흡으로 경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수년간의 의료봉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세요?

2011년 해외봉사로 네팔에서 활동할 때가 떠오릅니다. 네팔 수도 카투만두에서 버스로 14시간을 이동하고 네팔건즈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1시간 날아간 후 또 산길을 8시간이나 걸어가야만 했던 해발 3000m가 넘는, 세상에서 가장 오지 ‘무구’라는 지역에서의 의료봉사였습니다. 네팔지부 NGO 굿네이버스 봉사자와 코이카 네팔 현지사무소 직원 그리고 우리 한국의료진이 의료봉사를 시작했었습니다. 세상에서 난생 처음 의사를 본다는 그들을 대상으로 봉사할 때 한 어린아이가 2층 난간에서 떨어져 뇌가 손상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길이 험하고 교통수단이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인간의 힘이 미약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상황이 위원장님의 향후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개인적인 마음가짐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르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설정된 목표도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봉사가 아닌 생명을 살리는 봉사로 최고의 의료시설과 의료진를 꾸려 한 생명이라도 살리는 실천적 봉사로 전환하는 동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서울 아산병원 해외봉사팀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최첨단 장비를 갖춘 종합병원 시스템 의료로 해외 봉사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활동 중 가장 어려운 부분과 상황은 무엇이었나요?

현지인과 소통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나의 작은 손길이 진료하는 의료진에게 도움이 될 때 그리고 항상 ‘봉사’라는 것은 베푸는 것보다 배우고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을 배웠으며 제 생애에 ‘1+1’의 행복을 안겨 주었습니다.

위원장님께서 봉사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건강의 축복과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향후 의료봉사 및 취약 계층의 보건 향상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시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사회에서 소외되고 아직도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소득층, 독거노인, 장애인을 위한 봉사를 계속하고 싶고 미래에 마지막 소원은 고령화 사회에 노인 건강과 소외된 계층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 건강만 허락한다면 어디든 필요로 하는 곳에 갈 생각입니다. 욕심내지 않고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지금처럼 꾸준히 봉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김우중 의료봉사상’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먼저 저보다 더 훌륭한 의료인들이 많은데, 정말 이렇게 크고 과분한 상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김우중 의료봉사상’ 제정과 취지에 걸맞게 어려운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3회 김우중 의료인상 시상식 (2023.12.9.)

김우중 의료인상

1978년 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사재 출연으로 출범한 대우재단은 소득불균형이 크고 의료 이용 기회가 단절된 무의촌 지역을 대상으로 도서오지 의료사업을 시작하여 신안·무주·진도·완도 4개 지역에 대우병의원을 세웠습니다.

2021년 12월, 대우재단은 초기 무의촌 지역 의료사업의 취지를 되살리고자 ‘김우중 의료인상’을 제정했습니다. 재단은 그늘진 곳에서 인술을 베풀고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한국의 슈바이처와 나이팅게일을 발굴하고 지원합니다.

수상 자격은 국내 또는 국외에서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통해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하거나 보건의료사업 활동을 통해 의료인의 명예와 국위선양에 기여한 단체 또는 개인입니다.

김선협 대우재단 이사장은 “의료취약지역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곳의 주민들은 뜻있는 의료인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며 “김우중 설립자가 45년 전 무의촌 4개 지역에 병원을 세웠던 정신을 계승해 소외된 곳에서 인술을 펼치고 있는 참된 의료인을 찾고 지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제3회 김우중 의료인상 시상식 사진제공: 대우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