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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사선사-해외 취업에 도전하기

안녕하세요. 저는 김천대학교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Touro college를 졸업 후 미국 방사선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명화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기 전에 인생 선배이시고 저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 주신 김철구 선생님께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천대학교 재학 당시 저의 모교 선배님이신 김철구 선생님의 ‘미국 방사선사-해외 취업 특강’을 듣고 특강이 끝난 후 김철구 선생님께 달려가 메일 주소를 받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미국 방사선사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꿈을 구체화했던 계기는 김천대학교의 미국 방사선사 실습 기회였습니다. 김천대학교 나수경 교수님, 김창규 교수님의 도움으로 2015년 3명의 학생과 함께 Harlem hospital에서 미국 방사선사 실습 및 수업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병원 시스템, 의료 문화, 치료 환경을 체험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위한 의료인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새로운 길을 걷는 두려움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더 좋은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Touro college에 진학하였습니다.항상 그때의 마음을 되새기면서 미국 생활을 해왔고 결국 꿈에 그리던 미국 방사선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한국 국가 고시와 ARRT의 차이는?

미국에서는 한국의 방사선사 학위와 방사선사 면허가 인정되지 않아 ARRT(American Register of Radiologic Technologists)가 인정하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집니다. 또한 2년마다 24시간의 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10년에 한 번씩 Continuing Qualification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습니다. 이는 세부 항목별로 이루어지며,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의 지식이 유지되고 있는지 평가하고 보수 교육을 통하여 방사선사들의 수준 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방사선학과를 졸업하고, 면허 이수 후 원하는 분야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Radiology 과정을 졸업한 학생은 Radiographer(R)이 가장 먼저 주어집니다. 또 미국은 한국과는 달리 CT, MRI 분야에서 일을 하기 위해 추가적인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합니다. 미국에서 CT, MRI 자격증은 Radiographer(R)의 상위 자격증입니다. CT, MRI 등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전문성 또는 경력을 갖춰 수업을 듣고 실습 후 자격증 취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방사선사는 줄여서 Radiologic Tech.로 많이 불리지만 ‘tech’는 Technician 기술자가 아닌 Technologist를 써 Radiologic Technologist 혹은 Radiographer라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방사선학교 수업

제가 이수한 프로그램은 Advanced 프로그램으로(*2022년을 기점으로 Advanced 프로그램은 없어짐), 한국에서의 방사선과 학점을 인정받고 입학하여 수업보다는, 방사선사 자격증을 대비하는 수업을 위주로 진행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은 한국의 대학교 과정처럼 중간고사 시험과 기말고사 시험이 있었고. 쪽지 시험을 자주 치렀습니다. 졸업에 가까워질 때는 모의고사를 자주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방사선 학교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후 성적이 평균 75점 혹은 학교에서 정한 특정 점수 이하가 되면 개인 면담 후 퇴학 처리가 되기도 하는데, 한 학기가 지날 때마다 정들었던 몇몇 친구들이 사라진 걸 보면서 아쉬움도 컸지만 매우 원칙적인 미국의 문화에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방사선학교에서의 프로그램을 이수하면서 영어 수업을 병행했습니다. 미국에서 당연히 모든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업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현지인과 같은 영어 능력은 꼭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아침 9시에서 오후 4까지는 방사선학교 수업과 실습을 이수했고, 오후 5시부터 밤 9시까지는 CUNY(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에서 영어 수업을 들었습니다. 매일 1시간 거리를 뉴욕 지하철로 오가며 하루 18시간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매일 공부한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할 시간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밤 방사선학교 수업과 영어 학원 숙제를 하다가 책상에서 잠드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꿈에서도 그렸던 생활이었고 무엇보다 저에게는 미국 방사선사가 되어야 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항상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힘든 것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방사선학교의 실습

학생들은 방사선사와 마찬가지로 TLD dosimeter를 받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매달 한 번씩 그 결과를 제출해야 하며, 학교는 실습 중 학생 개개인의 연간 방사선 피폭을 최소화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한국에서 하는 실습은 대부분 Clinical observation, Shadowing으로 진행되지만 미국은 실습 병원은 학기별로 다르며, 매주 2~3번은 실습을 나갑니다. 주어진 스케줄에 따라 In patient, Out paint, OR, ER, Trauma 환자를 대면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분의 방사선사 선생님께 2~3명의 학생이 함께 배정되며, 직접 환자를 모셔와 포지셔닝을 잡고, 엑스레이를 조사합니다. 그리고 PACS로 전송 전 방사선사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점검을 받습니다.

복장은 학교마다 다르나, 제가 다녔던 Touro college의 경우 학교에서 지정한 짧은 랩 코트, 하늘색 셔츠, 흰 스크럽 바지, 흰 운동화를 착용해야 하며, 실습 중 Clinical coordinator에게 복장 규정에 대한 벌점을 받기도 하고, 실습 중 실습 태도나 실습 점수도 몰래 채점됐습니다.

unfair와 fair 사이

한국에서 배웠던 겸손이 실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보통 실습을 하다 보면, 자주 나오는 케이스도 있고 특수한 부위는(?) 아주 가끔 출몰하기도 하는데, 보통 그럴 경우 방사선사 선생님께서 순번을 정해주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 케이스를 이해한 친구에게 우선 배정해 주기도 합니다.

한 학생이 제가 해야 할 Clavicle 실습 케이스를 들고 본인이 하기 위해 도망간 적이 있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화도 못 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불공정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했던 것이 아직도 후회가 됩니다.한국에는 선배, 후배라는 문화가 있지만, 미국에서는 경력, 국적, 문화를 모두 존중하는 문화로, 내가 불공정하다고 느끼면 그 대상이 내 동료이건 직장 상사이건 본인이 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더 중요시합니다. 보통의 한국인인 저는 타인을 존중하되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는, 상황에 맞는 태도를 갖추는 노력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처음 실습할 때가 생각납니다. 정말 긴장되었는데, 직접 환자를 대면해 본 적도 없고 영어도 제대로 못한다는 생각에 걱정만 앞섰습니다. ‘과연 내가 이 케이스들을 다 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CT Tech.로 일하고 계시는 아주 인상 좋으신 분께 가서 “Kerri 아주머니 제가 영어를 잘 못 하는데, 혹시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혹시 Script를 적어 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부탁드린 후 공책에 받아 적어 환자 앞에서 책처럼 보며 읽었던 기억도 나고, 환자분께 포지셔닝 설명을 못해 더듬더듬 말하면서 바디랭귀지로 몸소 시범을 보여준 웃픈 기억도 납니다.

다른 학생들에게 뒤쳐질까봐, 영어 수업을 가지 않는 주말은 늦은 밤에 혼자 ER에 남아 늦은 밤까지 실습을 하기도 하였고, 누구보다 일찍 와서 다른 tech.들에게 궁금한 점도 물어보고 연습했던 추억은 힘들었지만 다시 생각하면 지금의 저를 있을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지금까지 멘토가 되어준 선배님들의 가르침과 응원 덕분에 힘든 일들을 버티며 미국 방사선사시험에 합격한 것 같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앞으로는 선배님들께 도움을 받은 만큼 저의 후배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철구 선생님, 나수경 교수님, 김창규 교수님, Ms. Evans, Mr. Baah, Dr. Ghattas, Ms. Kerri, Ms. Lauren과 저를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한번 더 감사함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