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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 나라에는 방사선사라는 직업군 자체가 없단다. 이럴수가…. 내가 언어를 배워 이 나라의 방사선사 선구자가 될까? 이런 생각도 잠시했다.”

지난 4월 25~29일까지 4박 5일간 지구의 서쪽 끝에 있는 유라시아 국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할 기회를 갖게 되어 참관 기간 동안의 소회를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국립암센터와 타슈켄트에서 기차로 2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마리칸트 국립암센터에서 Chemo port(항암치료 중심정맥관 삽입), PICC(말초삽입형 중심정맥카테터) 시술 참관을 하였다.

올해 4월 초 해외봉사에 관심이 있던 걸 아셨던 인터벤션실 교수님께서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시술을 보여주는 기회가 있는데 어시스트로서 갈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평소에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던 나는 교수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본격적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시술할 물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거 아니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서 우즈베키스탄이 어디에 있는지, 화폐 단위, 기후, 문화 등 무엇 하나 알고 있는 게 없다 보니 긴장감마저 들었다. 또, 국립암센터에 어떠한 장비가 있는지, 또 어느 정도까지 시술을 위한 도구들이 필요할지 알 수가 없어 막막하였고, 의사소통 또한 원활하지 않아 사전준비를 하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고민 끝에 최소한의 소독기구들을 제외하고 원내 국제팀과 협의하여 시술할 때 필요한 가운, 시술포, 멸균 장갑 등 시술실 안에 흔하게 있는 사소한 물품들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겨 우즈베키스탄에 갈 준비를 끝마쳤다.

4월 25일 드디어 출국 당일

이제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PCR 검사를 받은 서류가 필요하다는 얘기에 부랴부랴 문서를 구하러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다행히 인천국제공항 명지공항의원에 코로나19 검사하는 곳이 있어 서류를 받아 출국 준비를 마치고 그렇게 모든 물품을 챙겨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하였다. 더운 나라인줄 알았던 우즈베키스탄은 생각보다 덥지 않고 한국과 비슷한 기후였다. 들어보니 우즈베키스탄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4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고 했다. 덥기만 할 줄 알았던 나의 예상과는 반대였다.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첫날, 도착 후 우즈베키스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라마다호텔에 짐을 풀고 혹시나 빠진 짐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한 후 저녁을 먹으러 갔다. 과연 우즈벡의 음식은 어떨지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우즈베키스탄 국립암센터 병원장, 의사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4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이다 보니 식사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서툰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식사 메뉴로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말고기가 등장, 난감했다. 특히나 우즈베키스탄은 비즈니스 식사를 할 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문화가 있다. 술이 약한 나로서는 1시간이 하루같이 길게 느껴졌다. 이렇게 첫날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지막으로 하루가 지나갔다.

4월 26일 둘째 날

타슈켄트 국립암센터를 방문했다. 이번에 국립암센터에서 요청한 시술은 Chemo port와 PICC였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시술실에 어떠한 장비가 있는지 시술을 위한 최소한의 물품들은 준비되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환경이 열악했다. ANGIO 장비가 없어 C-ARM으로 대체하였고, 환자가 누워서 시술을 받아야 하는 침상 또한 높낮이 조절 기능도, 바퀴도 없는 침대였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국내에서 사소한 것들까지 챙기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필요한 재료대가 없어 부탁을 드렸다. 하지만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시술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낯선 환경, 덜 준비된 시술실, 부족한 인력 등 국내와는 완전 다른 분위기에서 시술을 시작하니 주위엔 시술을 참관하기 위하여 모인 의사들과 간호사들로 가득 찼다. 등에서는 연이어 식은땀은 나고, 도대체 방사선사는 어디있지? 하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이 나라에는 방사선사라는 직업군 자체가 없단다.

이럴수가…. 내가 언어를 배워 이 나라의 방사선사 선구자가 될까? 이런 생각도 잠시, 쉴 틈 없이 예정된 시술은 진행되었고 식사도 못하고 의뢰받았던 환자들의 시술을 끝내고 나니 오전 10시에 시작한 시술이 오후 4시에 끝났다.

참관한 의료진들과 사진도 찍고 서툰 언어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암센터의 일정을 무사히 끝마쳤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휴식도 잠시,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 식당으로 향하였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질 찰나, 저녁 식사를 하러 간 장소가 다행히 한국 식당이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우즈베키스탄 음식도 맛있었지만 역시 한국인은 흰 쌀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는 보편적인 경험을 했다.

4월 27일

사마리칸트에 있는 국립암센터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타큐켄트에서 한국의 KTX와 비슷한 속도의 기차를 타고 2시간 30분 정도 이동을 하여 사마리칸트 국립암센터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TACE(간동맥화학색전술)시술을 할 예정이었지만 ANGIO 장비가 없어 시술하지 못하고 전날 하였던 Chemo port 시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날 모든 물품을 타슈켄트 국립암센터에서 소진하고 와서 물품이 없던 와중에 한국에서 교수님께 연수를 받았던 우즈베키스탄 의사 오딜 선생님이 Chemo port 물품을 가져와서 환자 한 분을 시술할 수 있었다. 이곳 또한 어제 방문한 암센터와 환경이 비슷했다. 물품은 부족했고, 시술을 보러온 분들 때문에 소란스러워 교수님과의 소통마저 힘든 상황이었다. 다행히 한국에서 같이 간 통역 선생님의 활약으로 무사히 시술을 끝마칠 수 있었다. 준비해 간 재료대를 다 소진한 탓에 일정이 일찍 끝나 점심 식사 후 잠깐 관광을 즐길 수 있었다.

사마리칸트는 우즈베키스탄의 유명한 관광지라 볼 것들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별로 없어 대표적인 관광지만 보러 다녔다. 레기스탄 광장에 가서 보니 정말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레기스탄은 ‘모래땅’이란 뜻으로 옛날에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었다고 한다. 공공의 광장으로 왕의 알현식, 공공집회, 죄인의 처형 등이 행해졌고. 티무르 시대(1336~1405년)에는 대규모 노천시장이 있었으며, 그의 후손인 울루그벡 시대(티무르의 손자)에 처음으로 메드레세가 세워졌으며 메드레세의 맞은편에 하나카가 있었다. 광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진 것은 그 후 샤이바니 왕조(15~16세기)의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다른 2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이다. 3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 후 구소련 시절에는 이슬람 종교의 탄압으로 다시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이슬람 교육의 장소도 아니고, 노천시장도 아닌 관광지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관광을 마치고 타슈켄트로 돌아왔다.

한국에서는 의료보험 덕분에 누구나 아프면 참지 않고 바로 진료를 볼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꼈고, 한국의 의료 수준 또한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4월 28일 마지막 날

마지막 날에는 다시 첫날 갔던 국립암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째 날 시술 중에 우즈베키스탄 의사가 직접 시술을 해보고 싶다는 말에 교수님께서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Chemo port 시술을 해드린 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에게 작은 이벤트가 생겨 그 환자를 확인한 후, 첫날 시술을 해드렸던 환자를 한분 한분 찾아뵙고 불편한 점은 없는지, 이상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진료를 끝마치고 암센터에서의 일정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그 이후 가본 곳은 또 다른 사립병원이었다. 여기서 느낀 놀라움은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국립병원과 사립병원의 격차가 이렇게 심할 줄이야. 한국의 의료기관과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사립병원은 높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진료비 또한 너무 비싸 모든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는 아니라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의료 참관에서 느낀 점은 한국의 의료서비스는 선진국에 버금갈 정도로 우수하다는 것이다. 보건 의료정책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의료보험 덕분에 누구나 아프면 참지 않고 바로 진료를 볼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꼈고, 의료 수준 또한 한국이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찬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