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모기간: 12월 23일 ~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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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대한방사선사협회 기관지 방사협보 WITH KRTA 400호를 맞이하여
엑스선이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무렵부터 2024년까지 회원 간의 소통을 위한
회지, 학회지, 소식지, 방사협보 등의 변화를
협회사, 30년사, 50년사를 기본으로 하여 정리해 보았다.
글 이창엽(대한방사선사협회 60년사편찬소위원장)
1895
을미사변과 엑스선 발견
1895년에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2개의 역사적인 날, 즉 10월 8일과 11월 8일이 있다. 1895년 10월 8일에는 고종의 비 명성황후를 포함한 조선인 궁중 인사들이 경복궁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집단 살해당한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1월 8일에 독일 W. C. Roentgen 박사는 엑스선을 발견했고, 그 공로로 1901년 첫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을미사변으로부터 15년이 지난 1910년에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부르는 국권 피탈을 당한 한일합병(韓日合倂) 조약을 맺어야 했고, 다음 해인 1911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엑스선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34
조선뢴트겐협회 회지
1932년에 조선뢴트겐협회가 창설되었고, 1934년 12월 20일에는 조선뢴트겐협회 회지(朝鮮レントゲン協會會誌) 제1호를 발행하였다. 전체 회원은 32명으로 회장을 포함한 15명은 일본인이며, 17명은 한국인이지만 의사와 기술원의 구분이 없었고 엑스선의학과 기술의 연구발전및 친목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회지에는 엑스선 업무에 관한 강좌, 회원소식지, 회원명부, 회칙, 수필 등 모든 분야가 실려 있어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 엑스선을 다루는 회원들에게 관련 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을 처음으로 시작한 회지이다.
1956
1956년 6월 대한방사선기술학회 홍보지인 「단편소식」을 창간하고 같은 해 3차례 발행하였다.
1961
대한방사선기술학회 회지
8.15 광복(1945년), 6.25 전쟁(1950년~1953년), 4.19 혁명(1960년), 5.16 군사 정변(1961년)과 같은 국가적,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 가운데에서 1955년 3월 16일에 한국 방사선기술자들에 의해 창립총회를 개최한 대한방사선기술학회는 1961년 6월 22일에 會誌(회지) 1권 300부 발행을 시작으로 1962년 8월까지 총 4차례 발행하며 250여 회원의 홍보지 역할을 하였다.
1961년 6월 30일에 박양규 회장이 직접 보건사회부를 방문하여 장관, 의정국장, 의무과장에게 학회 회지 제1호를 증정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안 되는 시기이다. 모든 것이 통제되는 시기에 학회지가 발행되고 학회가 유지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경이롭다고 할 수 있다.
회지는 250여 명 회원의 학술 활동을 장려하고 앞으로의 면허시험에 대비한 강의록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유형선 부회장은 「회지 발행에 즈음하여」라는 인사말을 통해 비록 외세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학회운영에 대단히 흥분하였던 것으로 느껴진다.
1965
사단법인 대한방사선사협회 창립
1976
1976년 1월에 창간호를 발행한 대한방사선사협회 서울지부의 소식지는 1978년 1월에 17호 발행까지 하였다.
1978
방사협보 창간
대한방사선사협회 창립(1965년)으로부터 12년 후인 1977년 10월 22일 제13차 대의원총회에서 방사협보 발행이 결의되고 정기간행물 등록 절차를 마쳤다. 1978년 1월 26일 문화공보부(다-2276)에 등록하고 같은 해 2월 10일 출간 기념 행사를 가진 뒤 1978년 2월 28일에 타블로이판* 8면을 월간으로 방사협보 창간호(발행인 김천회, 편집인 정환)를 발행하였다.
창간호부터 2006년(제293호)까지 사용된 「放射協報」라는 제호의 글자는 그 당시 의료계의 유명 인사로서 국전 서예 부문 추천 작가로도 알려진 서봉 김사달 박사의 작품이다.
김천회 협회장은 창간사에서 「순수한 학술 활동을 위주로 하여 회원의 자질향상을 꾀하여 왔고 방사선 기술정보의 신속한 보급에 전력한 나머지 회원의 권익 옹호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너무나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회원의 권익신장을 위하여 전력을 투구할 1단계 사업으로 방사협보 창간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한방사선사협회 협회사(20년사)에는 방사협보 발행 목적을 「70년대의 급격한 과학 문명의 발달은 방사선 기술학의 급진적인 발달을 가져왔으며 회원의 수도 점차 증가해 매년 발행되는 협회지와 학술대회만으로 신기술의 신속한 전달 및 상호 교류에 대처할 수 없고 1976년에 회원명부가 발행되어 회무 등에 홍보를 하였으나 미흡한 실정으로 발행을 추진하기로 하였다.」로 기술하였다.
편집 기획, 게재기사 결정 방사협보 발행규정에 의거 설립된 15명으로 구성된 방사협보 편집위원 월정례회의를 통하여 방사협보 발행에 따른 자문을 하였다.
방사협보는 협회 기관지로서, 홍보지로서 협회소식, 방사선 신기술과 의료기술의 정보제공과 회원 동정을 게재하고 방사선 기술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신문인지 정기간행물인지 구분이 안 되었고 신문의 사명인 빠른 소식과 비판이 알차게 들어 있지 않은 면이 있었다.
협보를 발행하는 협회의 고충은 여러 측면에서 나타난다. 발행 초기에는 방사협보사로 상주하는 전임 편집 및 취재 기자 1명이 근무하였고 11개 시도회에 방사협보 담당 기자를 선정하였다. 그 후 400호에 이르기까지 방사협보를 본업이 언론인도 아닌 위원회에서 협보를 내야 하는 고충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며 회원 수는 증가하는데 발행 부수는 증가하지 않고 있었다.
* 타블로이드판(tabloid paper)은 일반적인 신문 크기인 블랭킷 판(blanket sheet)에 비해 면적 기준으로 절반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 보통 A3 사이즈(297×420mm) 정도의 크기를 말하지만, 판형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나 정의는 없다. 타블로이드판 크기는 국가 또는 신문사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방사협보는 실측 267×387mm 사이즈로 제작되었다.
1987
방사협보 제100호
1987년 4월 20일, 제100호 특집호(발행인 정환, 편집인 김병욱)를 맞이하여 발행기념회를 개최하였고 발행 면수도 기존 8면에서 16면으로 증면하였으며 특히 발행이래 처음으로 1면과 16면에 칼라 화보가 담겼고 2천 년대를 향한 방사선사 「연구하는 방사선사」라는 제목의 특집기사가 10면으로 게재되었다. 신문 발행에 관여한 공로로 4명(이찬호, 곽종칠, 배용모, 조정호, 조규태)에게 시상하였다. 당시 전국 회원 수는 2867명이었다.
이경희 전 대한방사선기술학회 회장은 「8.15 광복, 6.25 전쟁 등 민족적 시련으로 별로 발전을 못했던 시기였고, 그 후 10년은 전후복구 등 복구기로 우리 학계 역시 겨우 외국에 눈을 돌리게 된 시기였으며 다음 10년 즉 70년대 중반까지는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시기였는 바 즉 교육기관의 설립, 자격의 확립 또 경제호황에 힘입어 외국장비의 도입, 바로 이때 우리의 기관지인 협보가 탄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천회 전임회장은 「방사협보는 방사선과 보건분야의 새로운 정보・기술을 회원상호 간에 교환하고 전달함은 물론 회원의 동정과 근황을 알리고 사명감을 고취시키므로서 회원 간의 화합과 인화를 도모하는 교량 역할을 다하고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권력 앞에서 굴하지 않는 언론 고유 기능을 다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고 여실히 표현하는 신뢰 받을 수 있는 신문이 되도록 창의적인 노력을 경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993
방사협보 축쇄판
1993년 1월 25일 방사협보 축쇄판(220×310mm) 상하권 각 1천 부씩 발행하여 유료 판매하였으며 수익금은 회관 건립 기금으로 충당하였다.
1994
지면 변화
1994년 1월 3일(제161호)부터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 협보 활자를 증배하고 1면과 12면은 칼러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97
방사협보 제200호
1997년 1월 1일(제195호)부터 협보 인쇄 방향이 세로 읽기에서 가로 읽기로 변경되었다. 1997년 7월 1일 제200호(발행인 김건중, 편집인 박용흠)를 12면에서 20면 특집 증면 발행하였고 김건중 협회장은 「방사협보가 좀더 발전하고 변모된 모습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하였으며 「아무리 좋은 기사라도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에 회원 곁으로 가까이 가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21세기를 대비한 방사선사의 역할과 이정표를 정립하고자 특집 좌담회 『21세기 방사선사』를 개최하고 토론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4개면을 할애하여 지상 중계하였다. 박용흠 편집인은 『100호와 200호』 라는 논단에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여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고 보람과 만족을 추구하여 회원으로부터 사랑 받는 신문이 되기 위해 쉼없이 전진 해야 된다」고 하였다.
1978년에 방사협보 편집위원 조직이 1999년 02월 12일에 방사협보편집위원회(조남수위원장 외 4명)로 구성되었다.
2015
발행 판형, 발행 주기 변경
2014년 7월 4일 제2차 방사협보 편집위원회에서 기존의 신문형식에서 A4 사이즈 책자로의 변경안과 분기별 발행 주기가 검토되었고 2015년 2월 28일 제53차 정기대의원총회 의결되어 1978년 2월 발행이 시작된 타블로이판 월간지 방사협보는 2015년 4월 제360호(발행인 이용문, 편집인 김석태·이익표)부터 국배판(A4) 변형 사이즈(215×280mm)의 계간지로 변경되었다.
이용문 협회장은 제360호 방사협보 계간지 발행에 즈음하여 「방사협보가 최근 IT산업의 혁신적인 발달과 다양화로 인해 과거와는 달리 보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 전달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과거 방사협보의 주요기능인 News Letter의 역할보다는 현시대의 회원들과의 소통을 밀착하게 하고 협회와 회원들의 미래를 위한 알찬 정보들로 가득찬 기관지로서의 제 기능을 다하는 방사협보로 새롭게 변신하여 계간지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방사협보 계간지 발행 목적을 설명했으며 아울러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변모된 모습으로 역할을 다 할 것과 친근하게 회원들에게 다가가기를 기대하며 유익한 정보지로 활용되는 협보가 되겠다」고 하였다.
2016
ISRRT2016 특별판·제367호(발행인 이용문. 편집인 김석태·이익표)가 36쪽으로 발행되었다.
2017-2024
1978년 창간호부터 2003년까지는 매달 발행되었으나 그 후로는 발행주기가 일정하지 아니하다가 2015년 4월(제360호) 판형과 발행주기의 변화가 생긴 후부터 현재까지 제호, 발행일, 발행주기, 크기 등이 다양하게 변화 발전된 방사협보가 발행되고 있다.
발행한 지 46년이 지난 대한방사선사협회 기관지인 방사협보는 사전적 의미로 협회에 관한 일을 그 회원에게 알리는 보고 또는 그런 간행물인 것이다. 협회의 역사가 쌓이고 기록되는 중요한 회보임을 감안하면 선배 회원들이 지적했던 다양한 변화에 대한 대책과 실행방안이 구체적으로 진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1978년 창간호 발행 때 협회 회원 수는 1,150여 명이었으나 2024년 11월 현재 협회 회원 수는 5만 5천 명으로 증가 되었으며 최근 5년 간 발행 호당 부수는 평균 3,500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