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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으로 3년이 지나가면서 조심스럽지만 밀렸던 숙제를 하듯 건강이 좋지 않은 장모님을 모시고 야생화 군락지인 곰배령을 찾기로 했다. 설악산과 한계령을 마주한 점봉산을 오르는 곰배령은 정상부가 만삭의 여인처럼 볼록하게 솟아 초등학교 저학년도 쉽게 오를 만큼 부담 없이 등산할 수 있다. 수려한 설악산과 달리 수수한 점봉산은 산림청에서 생태 보호를 위해 산행 인원을 제한한다.

월, 화요일과 겨울에는 입산을 통제하고, 출입이 가능한 날에도 9시, 10시, 11시에 각각 사전 예약한 150명씩만 입산이 허락되는 곳이다. 한사람 예약하면 성인 동반 1인과 어린이 2명까지 입장할 수 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출발하면 양양고속도로까지 거침없이 3시간 정도 달리고 내린천을 지나 점봉산 생태공원휴양림에 도착할 수 있다. 일요일 오전 11시로 예약한 우리 가족은 10시쯤 도착했다. 생태관리센터 지킴이분에게 말씀드리자 바로 올라가라고 하신다. 신분증을 보여드리고 입산 허가증을 받아 천천히 산행길에 올랐다.

천상의 화원이라고 부르는 곰배령은 정상으로 오를수록 봄꽃이 화려했다. 800여 종의 야생화가 피어난다고 하는데 처음부터 우리를 반기는 야생화는 얼레지 꽃이다. ‘노루귀’라고도 부르는 만큼 모습이 그러하다. 생소하지만 검색해 보니 외떡잎 식물의 백합목 백합과라고 한다. 6개의 보라색 꽃잎은 한송이만 피어나 있다.

곰배령의 야생화들
숲에서 만난 둥치

곰배령 산행 코스는 제1코스와 제2코스가 있는데, 올라갈 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제 1코스로 올라가야 한다. 산길은 설피밭 삼거리에서 시작된다. 왼쪽은 강선골, 오른쪽은 백두대간 단목령으로 간다. 왼쪽 강선골로 방향을 잡는다. 생태체험 프로그램 참가자에게는 노란 조끼가 주어진다. 보호림 관리소를 지나면 곧장 활엽수가 만든 깊은 터널 속으로 빠져든다.

삼거리에서 강선골 까지는 30분 거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을 꼽으라면 당연히 첫손에 꼽힐 만큼 아름다운 길이다. 이 길은 차로는 오갈 수 없다. 활엽수림 속으로 사람들만 다니는 널따란 길이 나 있다. 길은 초입부터 마을과 만날 때까지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다. 계곡은 제아무리 깊은 가뭄이 들어도 마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강선마을까지는 오르막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만하다.

산행을 위해 물과 간식을 준비했지만, 입구부터 강선마을까지 완만한 길을 30여분 걷다 보면 양쪽에 파전집이 있다. 특이한 점은 산장을 겸하는 손님에게만 산나물 비빔밥을 팔고 등산객에게는 파전, 도토리묵, 감자전, 막걸리를 판다는 점이다. (카드 결제가 안 될 수도 있으니 현금도 조금 챙겨가기를 권한다.)

우리 일행은 산나물전과 감자전을 시켜 먹었는데 밀가루는 거의 없고, 진한 산나물 향이 일품이었다. 지금껏 맛보지 못한 산내음이 입안 가득 퍼진다. 장모님은 당뇨가 있어 믹스 커피를 시켜 드셨는데 계산할 때 사장님의 ‘서비스’라는 말에 기분 좋게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배도 채웠겠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해 볼까? 하고 신발끈을 묶었지만 평지를 걷는 것처럼 좌우에 핀 꽃을 여유 있게 볼 수 있다. 점봉산에 가장 널리 분포하면서 소백산과 백두대간에 분포하는 샛노란 ‘한계령풀’, 난초과의 ‘나도제비란’은 잎사귀가 장미처럼 초록 꽃다발로 낮게 깔려 있다. 한참을 거닐다 보니 아담한 폭포수가 나타나 눈과 귀가 호강했다. 어느덧 정상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니 하늘 끝이 보이며 마지막 숨을 헐떡이게 했다.

정상은 푸른 초원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 ‘천상의 화원 곰배령 1164m’라는 포토존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념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다. 바람이 꽤 세다. 볕은 따뜻하건만 맑은 하늘에 설악산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을 따라 시선이 가는 곳에 백두대간 줄기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하산 길은 좀 더 여유 있게 쉬어가며 내려올 수 있었다. 강선마을 파전집 아주머니가 다시 반겨 주신다. 그러고 보니 입산했던 손님을 만날 수밖에 없으니 눈썰미 있는 장사 노하우이리라.

강원도 인제의 오지 마을이지만, 지금도 등산객을 위한 민박집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설피마을에서 연상하듯 겨울 산행에 아이젠이 없으면 오를 수 없다고 한다. 사계절 야생화가 피어 보존되는 이곳 곰배령. 계절별로 맛보고 싶은 숲 내음, 그날이 또 기다려진다.